19세기 말 미국에서 태어난 햄버거는 가장 미국다운 음식이다. 미국의 국력을 배경으로 미국 대중문화와 함께 전 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간 음식이다. 햄버거의 가장 큰 특성은 패스트푸드라는 점이다. 패스트푸드는 주방에서 전 과정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공장제 반제품 재료로 빠른 시간에 만든다. 재료의 질이나 조리의 정성보다는 싼 가격으로 소비자 입맛에 맞추고자 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양질의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든 수제 버거도 있다. 수제 버거는 젊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차츰 늘더니 최근에는 다양화 고급화하는 추세를 보인다. 서울 홍대입구, 강남, 이태원 등에서 쉽게 눈에 띈다.
젊은이들 거리에 고급 수제 버거 열풍 모락모락
서울 코엑스의 에서는 고급 수제 버거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이 집은 버거나 요리와 함께 술도 마실 수 있는 게스트로 펍(gastro pub)을 지향한다. 2009년 홍대입구에 처음 문을 열고 고급 수제 버거를 선보였는데 젊은 고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에 힘입어 광화문에 이어 지난 3월 이곳에 문을 열었다. 마치 중세시대 성문처럼 육중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천장이 시원하다. 탁 트인 전면 유리창, 갈색과 검정색 톤을 강조한 실내 분위기가 심플하면서 차분하다.
‘요리’란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일본이다. 우리는 조선시대에 정조(鼎俎) 할팽(割烹) 치선(治膳) 규곤(閨壼) 등으로 썼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여러 조리 과정을 거쳐 음식을 만듦. 또는 그 음식’이라는 뜻의 낱말이 ‘요리’로 굳어졌다. 어쨌든 요리는 여러 조리 과정을 거친 음식이다. 패스트푸드 전문점의 햄버거를 쉽게 요리로 부르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주방 그릴 위에서 버거 패티가 익고 있었다. 미리 조리해둔 버섯이나 양파, 소스, 치즈 등이 차례로 패티 위에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칙칙 거리는 불길과 함께 맛있는 냄새가 주방 안에 확 풍겼다. 이 주방을 책임진 사람은 이재영 총괄 셰프. 미국 명문 조리 교육기관인 CIA를 나와 미국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베테랑이다. 그가 직접 소스를 만들고 패티를 굽는다. 미국 유학 시절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던 그여서 그런지 완성된 버거에서 색채와 조형을 신경 쓴 느낌이 든다.
패티를 비롯, 버거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100% 직접 구매한 신선 재료를 조리해 쓴다. ‘버거비 타임즈’라는 신문 모양의 이 집 메뉴판에는 아주 다종다양한 수제 버거와 음식들이 6면의 지면(?)을 꽉 채웠다. 조리실에서 실시간으로 식재료 종류와 조리 방법에 따라 셰프가 직접 버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풍미 그윽한 버거와 개성 강한 수제 생맥주의 어울림
고객이 가장 많이 찾는 버거가 얼티메이트 BB 버거(1만3000원)다. 소고기 맛을 가장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는 메뉴다. 토마토나 다른 채소류를 일부러 넣지 않았다. 오히려 채소가 들어가면 고기 맛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오직 고기의 맛을 심플하게 강조했다.
버거의 핵심은 역시 패티다. 중량 200g의 디럭스 스타일로 한눈에 봐도 두툼하다. 크기만 큰 것이 아니라 소고기 목심을 주방에서 갈고 다져 직접 패티를 만들어서 쓴다. 방금 불에 구운 중후한 훈향이 버거 맛의 중심을 든든하게 잡아준다. 졸임 양파와 스위스의 그뤼에르 치즈가 들어간 아이올리 소스들 곁들였다.
여기에 가늘게 썰어 튀긴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로 한 세트를 구성했다. 트러플 아이올리 소스나 밀크셰이크에 찍어 먹는 슈스트링 감자튀김은 가늘고 기름기가 적으며 바삭해 맥주 안주로 최적이다. 유지방의 풍미와 단맛이 강한 밀크셰이크는 젊은 여성들이 특히 좋아할 맛이다.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에는 콜라가 어울리지만, 수제 버거에는 각종 술을 곁들여 먹으면 한결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는 위스키, 데킬라, 보드카, 진, 럼 등 웬만한 술집보다 더 다양한 술들을 구비했다. 수십 종이 넘는 메뉴판의 술 이름을 보면 이 집이 펍(pub)임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와인과 함께 생맥주 가짓수가 많다. 들머리에 18가지 개성이 강한 수제 생맥주인 크래프트 비어를 즉시 퍼 올릴 수 있는 탭을 설치했다. 도무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난감할 정도다. 그럴 땐 샘플러를 시음해보고 선택하면 된다. 샘플러는 4가지의 서로 다른 생맥주로 구성했다. 생맥주 가격은 대체로 유리잔 한 잔에 9000원~1만원 안팎이다.
아메리칸 퀴진 반영한 신 메뉴, 12시간 걸리는 소스도
이 집은 기본적으로 게스트로 펍이지만 최근의 다양한 요리법과 미국식 복합 요리인 이른바 ‘컨템포러리 퀴진(comtemporary cuisine)’이나 ‘아메리칸 퀴진(American cuisine)’의 콘셉트도 엿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에서 방금 귀국한 사람이나 코엑스에 볼일을 보러 온 외국인들이 내 집처럼 편히 드나든다.
미국 문화는 용광로 문화라고 한다. 음식 문화에서 그 점이 더 두드러진다. 드넓은 미국 땅에서 제철마다 풍부하게 나오는 각종 식재료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조리법이 합쳐져 미국만의 독특한 최신 스타일의 요리가 탄생한다. 바로 아메리칸 퀴진이다. 이 집에서는 최근까지 미국에서 배우고 활약한 이 셰프가 물오른 솜씨를 선보인다.
- 버거비 맥주와 음료
버거 외에도 다양한 신 메뉴들이 모두 그의 작품들이다. 치즈 퐁듀 브리오쉬(1만1000원)와 소의 횡격막 부위인 행어 스테이크(Hanger steak 220g 2만2000원)가 대표적이다. 치즈 퐁듀 브리오쉬는 파마산 치즈 등 4가지 치즈와 햄, 달걀 프라이가 들어간 퐁듀와 고급 버터로 구운 브리오쉬(brioche)가 나온다. 달걀을 잘 저어주고 밑에 깔린 베이컨을 잘게 잘라준 뒤 함께 먹으면 치즈의 깊은 풍미가 입안에서 오래 여운을 남긴다.
행어 스테이크는 소의 횡격막을 저온조리법인 수비드 방식으로 장시간 익힌 뒤 다시 그릴에 두 번 더 구워 맛과 식감을 최대한 높였다. 수란, 버섯, 계절 채소가 곁들여진다. 이 메뉴의 소스는 무려 12시간이나 걸려 공들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재료비나 들이는 공력이 스테이크를 능가한다는 것. 12시간이면 웬만한 곰탕 육수 내는 시간과 맞먹는다. 그렇다면 패스트는커녕 슬로우도 그런 슬로우가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만 고급 수제 버거 열풍이 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유럽 귀족 요리의 자존심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입맛을 가진 프랑스인들. 이 프랑스에서도 수제 버거 판매량이 급증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버거도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식이 된다.
<버거B> 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 513 코엑스몰 P103 070-4221-9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