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뛰어놀던 동네를 연상케 하는 종로구 부암동 나지막한 언덕길을 올라 골목골목을 지나면 서울 속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과연 그녀는 부암동에서 어떤 그림을 본 것일까. 인테리어 디자인숍 '멜랑콜리 판타스틱 스페이스 리타'의 김재화 실장이 공개한 그녀만의 소울 키친.
세월의 때가 묻은 오래된 빌라 2층에는 그녀의 작업 공간임을 알리는 '멜랑콜리 판타스틱 스페이스 리타'라는 글씨가 현관에 선명하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낡은 외관과 회색빛 계단과는 대조적으로 내부는 무척 밝고 따뜻하다. 주로 화이트 컬러와 나무 소재(애시목)를 사용해 깔끔하면서도 카페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하다.
김재화 실장이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CD 플레이어에서는 노르웨이 출신 팝포크 듀오 'Kings of convenience'의 'Mrs. Cold'가 흐르고 있다. 이 집을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음악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걸 김재화 실장도 알고 있었던 걸까. 거실 의자에 앉아 천장까지 짜 올린 CD장을 보며 그녀의 남편이 한밤의 라디오 프로그램 '심야식당'의 윤성현 PD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녀가 집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신경 썼던 부분이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CD장에는 꽤 많은 음반이 꽂혀 있음에도 아직도 채워야 할 공간이 훨씬 많다. "그동안 여기저기 숨어 있던 CD들이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되니 여간 기뻐한 게 아니었어요. 어젯밤에도 내일 < 에쎈 > 에서 촬영을 온다고 하니, 늦게까지 CD를 정리하더라고요. 주방 촬영이라 그쪽은 안 나온다고 해도 마치 자기 얼굴이 나오는 것처럼 신경 쓰는 모습이 재미있어요." 그녀는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1 촬영 스태프들을 위해 김재화 실장이 손수 만든 가지카나페와 샐러드. 2 예쁜 주방에 들어서면 맛있는 음식이 절로 만들어질 것만 같은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3 천창에서 내려오는 따뜻한 햇살이 잘 어울리는 나무 소재의 CD장은 앞으로 부부가 채워나갈 추억을 기다리는 공간들이 정겹다.
심플함 속에 숨은 실용적인 주방
집을 스튜디오 겸용으로 쓰다 보니 큰 방을 스튜디오로 사용하고 작은 방은 침실로 쓰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주방이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요리 솜씨는 아니지만 음식을 좋아하고 뭔가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해서 주방은 제게 무척 특별해요."
사실 가장 의아했던 부분이 그녀의 주방이다. 어느 집에 가든 쉽게 볼 수 있는 상부장도,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꽤나 받아보았나 보다.
"있을 건 다 있어요." 실제로 커튼으로 가린 하부장을 살짝 들추니 여느 집에 다 있는 조리도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상부장을 떼어내고 선반을 단 것은 좁은 공간 탓도 있지만 답답한 것을 워낙 싫어하기도 해서다. 게다가 냉장고도 들어가지 않는 좁은 주방이라 최소한의 요소만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그릇과 밥통 등을 놓을 장을 슬림하게 짜 넣었다. 또 하부장에는 문을 다는 대신 흰색 캔버스천으로 커튼을 달아 전체적인 색감을 맞추고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주방에서 사용할 것이라 물 흡수가 적고 때가 묻어도 닦아서 쓸 수 있는 불연성 소재를 사용했다. 냉장고나 식기세척기 등의 전기제품 역시 과감히 캔버스천으로 가려 깔끔하게 정돈했다. 보이는 것은 '심플' 그 자체이지만 냉장고 위쪽에도 수납공간을 만들어 빈틈없이 수납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처음 보신 분들은 다들 그러세요. 이 주방에서 어디 요리나 할 수 있겠느냐고. 공간도 좁고 조리도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까 더 그런가 봐요. 저는 물건들이 밖에 보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최대한 숨길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마련해 정리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매일 아침 간단하게라도 식사를 준비하고, 생선도 굽고 된장찌개도 끓이는 아주 평범한 주방이에요."
그녀는 그녀와 남편이 좋아하는 파스타를 자주 만들어 먹는데,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비장의 파스타와 카나페, 샐러드 등을 대접하는 것을 즐긴다고.
1 주방이 좁아 식탁 겸용으로 사용하는 거실 테이블 역시 애시목을 사용해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과 잘 어울려 따뜻한 느낌을 준다. 2 주방에서 만든 음식을 거실의 테이블까지 이동할 때 사용하는 이동형 철제 트롤리.3 흰색 캔버스천으로 직접 만든 커텐은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는 효과와 함께 열고 닫기 편해 실용적이다.
행복한 주방, 숨 쉬는 집
요리를 잘하는 엄마 덕에 본인 역시 요리를 즐기고 '집밥'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김재화 실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죠. 가족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아주 따뜻한 공간이 바로 주방이에요. 그러니 주방은 기분 좋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해요." 마음에 드는 주방이야말로 여자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도 같다.
구수한 커피를 마시며 바라본 창밖으로는 옹기종기 모인 부암동 집들과 나무 위에 둥지를 튼 까치가족, 저 멀리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에는 불을 켜지 않아도 집 안 곳곳까지 빛이 들어온다는 이 집은 사실 북향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밝은 까닭은 천장에 나 있는 천창과 통일성 있는 화이트 소재를 사용해 실내를 심플하게 꾸몄기 때문이다. 이 집을 구상하면서부터 그녀는 창밖의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집 안에 요소가 많으면 그것만으로도 시선을 빼앗기죠. 그래서 창밖을 내다볼 여유조차 없어져요. 집은 숨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어야 해요. 물론 살림을 살다 보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아져요. 그러니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갖춰놓으면 살면서 생겨날 물건이나 짐을 놓을 곳도, 재미도 없어져요. 그래서 집에도 공간이 필요해요. 살면서 늘어나는 짐이 얼마나 많은지 다들 아시잖아요. 하나씩 채워나가는 것이야 말로 집과 함께 추억을 만드는 과정이지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짜 맞추는 것은 숨을 막히게 하고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집도 사람도 숨 쉴 수 있는 한 귀퉁이만 비워두어도 '숨 쉬는 멋진 공간'이 탄생된다. 그녀의 심플한 공간처럼 말이다.
김재화 실장의 또다른 공간 오래된 복도식 주방의 변신 청담동 S-house
청담동의 20년 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한 작업으로, 냉장고를 둘 공간조차 애매한 복도식 주방이라 불편함이 많았다. 먼저 답답해 보이는 상부장을 없애고 주방과 거실 사이에 가벽을 세워 냉장고 넣을 공간을 만들고 거실 쪽에는 책장을 만들어 공간을 분리해 효율성과 아늑함을 주었다.
1 상부장을 없애는 대신 측면에 키가 큰 장을 제작해 넣고 냉장고 위쪽 공간도 수납공간으로 활용했다. 2 좁은 주방에 상부장이 있으면 더욱 갑갑할 수 있다. 과감하게 상부장을 제거하고 같은 소재의 나무 선반을 사용해 넓어 보이는 효과를 내는 것은 물론 공간이 훨씬 깔끔해졌다. 3 주방과 거실 사이에 가벽을 세워 냉장고를 수납하니 공간이 분리되어 주방이 더욱 아늑해졌다.
※ 좁은 주방의 경우 바닥과 벽면에 같은 소재를 사용하면 공간이 훨씬 넓어 보이고 통일성 있게 보인다. 시멘트 느낌의 타일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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