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스테이크’의 한식 퓨전 버전인 ’대구말이 무스’. 밑간한 대구포를 말아 그 안에 은행, 잣, 대추채, 명란젓을 넣은 생크림 무스를 살짝 채운 다음 오븐에 구워냈다. 다진 유자청과 아몬드로 채운 뒤 구운 연근, 구운 단호박을 곁들이고 마지막으로 무화과 소스를 뿌렸다. 겉으로 보면 생선구이지만 칼로 썰면 생각지 못했던 재료와 맛이 툭툭 튀어나와 먹는 이를 즐겁게 한다.
접시에 맛을 ‘그리는’ 푸드 아티스트
입체적이고 과감한 스타일링으로 유명한 이종국 선생의 트레이드 마크는 그림처럼 담아낸 모던한 한식 요리다. 그 담음새가 화려하고 독특해 그를 단순히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오해하는 이도 있지만, 쟁쟁한 한식 대가들부터 재벌가까지 그가 차려낸 상을 즐기러 찾아올 만큼 그의 요리는 깊고 담백하다. 또 냉장고를 훑은 다음 단시간에 쓱쓱 요리하고 코스로 차려내는 그의 순발력과 감각은 늘 초대 받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종국 선생은 요리를 전공하지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도 없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타고난 미적 감각과 순발력에 어머니의 손맛과 요리 끼를 물려받았고, 수많은 국내외 여행으로 다양한 카테고리의 요리들을 스스로 체득해왔다. 그에게 요리와 미술은 따로 있지 않다. 미술이든 요리든 재료가 가진 고유의 성질을 최대한 살리되, 컬러나 맛이 지나치지 않게 그만둘 때를 알고 손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그의 요리 철학이다.
한식 모던화, 채집 요리에서 찾다
한국 요리 연구가로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한식을 ‘질펀하게 담아내는 요리, 맵고 자극적인 요리’로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바꾸기 위해 많은 한식 연구가들이 각각 개성 있는 시각으로 한식 세계화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요즘 그가 주력하는 부분은 ‘채집 요리’다. 제철 재료로 조리하면서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풍부하게 표현하는 요리로, 불필요한 양념과 복잡한 조리 과정은 줄이고, 그가 개발한 오디 소스, 무화과 소스, 청양고추 식초 등의 한국적인 소스 혹은 여기에 궁합 맞는 이국적인 식재료를 가볍게 섞어 마무리한다. 재료 색을 극대화시키는 스타일링과 붓으로 그린 듯 뿌려진 소스는 혀로 맛보기 전 눈을 더 즐겁게 한다.
- 거실 전경. 테이블은 거실 중심에, 가구는 벽면을 따라 배치함으로써 사람들이 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본연의 기능을 최대한 살렸다. 소반, 다양한 스타일의 고가구 장을 아기자기한 소품과 배치했는데 특히 커튼 옆에 걸어둔, 규장각에서 쓰였다는 총채가 시선을 끈다.
2 바르셀로나 체어와 금속판 경첩의 어울림이 이색적이면서도 모던하다.
3 조형적으로 쌓아 올린 소반 위, 작은 도자기와 꽈리를 운치 있게 놓았다.
마음에 품었던 동네, 성북동 집
좋아하는 이들을 성북동 집으로 불러 맛깔스럽고 정갈한 코스 요리를 먹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담소를 나누는 것이 그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게다가 고가구와 그림들로 꾸민 그의 집은 그 요리를 더욱 편안히 음미하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대표적 부촌인 성북동 지금 사는 집에 터를 잡은 지도 5년. 혹자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편하게 살면서 그림 그리고 요리하는 남자라 생각하지만 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부산과 창원 등 지방에 거주할 무렵, 일 때문에 갑자기 서울 출장을 왔는데 주말이라 웬만한 숙소는 예약이 차 머물 곳이 없어 ‘이 넓은 서울 땅에 내가 잠잘 곳 하나 없나’라는 서글픈 감상에 빠져 헤매다 우연히 성북동까지 넘어왔다. 그 때 서울에도 이런 데가 있나 싶을 만큼 조용하고 공기 좋고 평화로운 이 동네에 매료되었고, 당시 자신의 상황과 대비되어 ‘그래, 몇 년 안에 성공해서 꼭 이 동네에 살리라’ 다짐했단다. 그리고 몇 년 후 성북동의 아랫동네에서 시작한 그의 서울 재입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위로 이동하며 지금의 성북동 집에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한국 고가구와 그림 컬렉터
이층 높이의 높은 천장과 벽난로, 천장의 나무 빔 장식 등 거실에서 본 이종국 선생의 성북동 집 구조는 영국풍 컨트리 하우스에 가깝다. 그러나 낮은 툇마루 스타일의 테이블을 중심으로 벽난로, 소반, 반닫이, 궁중장 등 한국 고가구들이 바르셀로나 체어, 유럽의 앤티크 프롤어 스탠드 등 전혀 어우러질 것 같지 않은 오브제들과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각기의 색깔을 조화롭게 보여준다. 중학교 시절부터 이른바 ‘앤티크 컬렉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그는 척 보면 언제쯤, 어디서 사용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고가구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한국 고가구 중에서도 특히 선이 간결하게 떨어지고 경첩과 모서리 장식, 고급스러운 나무 질감 등 디테일이 섬세한 디자인을 선호한다. 오래된 가구들과 소품을 모으면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가구나 앤티크 소품의 모양새는 참 많이 닮아있다는 것도 알았다. 당연히 한국 도자기라 여긴 거실 테이블 위의 컵과 나무 트레이는 영국 제품이었고, 공구가 장식된 벽난로 앞 원형 나무 패널 역시 유럽에서 쓰던 마구간 정리 도구들이라니. 주방에도 마찬가지로 유럽 앤티크 장 안에 한국 제기를 차곡차곡 넣어 정리했는데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그래피티 작가 키스 하링을 비롯해 사진작가 구본창,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등 추상화부터 개성 넘치는 사진 작품까지 시공을 초월한 작품들이 반닫이 위, 벽난로 옆, 약장 위에 툭툭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그림이든 가구든 정수를 이루는 작품은 출신 나라가 어디건, 시대가 언제건 관계없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한식을 뛰어넘어 외국인들에게도, 세계에서도 어필할 수 있는 모던한 한식, 어느 나라 요리냐도 중요하지만 출신에 관계없이 요리의 맛 자체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대학로에서 ‘봉황날다’라는 예약제 한식당을 운영하기도 한 이종국 선생은 얼마 전 레스토랑 클럽 모우(Club Mow)의 마스터 셰프라는 타이틀을 새로 추가했다. ‘클럽 모우’는 ‘골프&라이프스타일’이라는 모토 아래 각종 세련된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골프 클럽으로, 그는 클럽 모우 1층에 자리한 ‘Foraging Food Restaurant by 이종국’을 책임지고 진두지휘를 맡게 된 것. 그래서 정식 오픈일인 10월 28일을 앞두고 인테리어 진행 상태를 체크하며, 여러 관계자들과 함께 새로운 메뉴를 테스트하는 등 마무리 준비로 한창이다. 레스토랑의 콘셉트 역시 그가 추구하는 채집 메뉴다. 산지에서 공수해 자연의 기운을 간직한 채집 식자재와 이종국 선생 특유의 미감이 만날 이번 레스토랑에 대해 지켜보는 눈이 많고, 그만큼 어깨도 무겁다.
1한창 오픈 준비 중인 도산공원 옆 클럽 모우 레스토랑. ‘모던 한식’에 맞춰 레스토랑 인테리어도 내추럴 모던 스타일을 지향한다.
2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이 만든 독특한 종이봉투 조명 코너. 종이봉투를 쭉 붙여 마치 한지 등처럼 거대하게 연출한 로비 코너가 인상적이다.
세계인을 겨냥한 한국 요리를 꿈꾸며
얼마 전 외국에서 미슐랭 레스토랑 가이드 관계자가 내한해 이종국 선생의 집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관계자는 선생의 요리를 눈으로 감상하고 입으로 음미하면서 한식에 대해 새로이 보게 되었다고 했단다. 훌륭한 건강식 조리법과 누구나 즐길 만한 식자재가 많음에도 수많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을 가진 일본에 비해 한식은 아직도 외국인들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맛있는 요리도 중요하지만 맛있을 요리를 어떻게 쉽게 손이 가도록 만드느냐, 이 어려운 숙제를 그는 새로운 레스토랑을 통해 풀어보려 한다.
- 11월이 제철이라 알이 가득 찬 참깨를 살짝 찐 다음 잘라 낸 참게찜. 이종국 선생은 여기에 겨잣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풀어 유자청과 함께 섞어 발효시킨 특제 소스를 곁들여 낸다. 유자의 달콤함과 톡 쏘는 겨자가 고소한 게알과 어우러져 씹을 새도 없이 스르르 녹아드는 맛이다.